신경림 시인(본명 신응식)이 지난 22일 별세했다. 내가 신경림 시인을 처음 뵌 것은 1997년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시절 ‘그이의 사는 법’이라는 열 두 페이지짜리 인터뷰 때이다. 시인과 이틀 동안 작가회의와 남한강 등을 동행 취재했고, 이후 <여성동아> 시인탐방과 <오크노> ‘참지성인을 찾아서’ 기획 인터뷰를 더했다. 시인은 이성부 시인과 섬문화연구소 고문으로도 활동했고 신경림 시인의 소속인 무명산악회와 이성부 시인과 내가 소속된 만고산악회가 함께 등반하기도 했다. ‘신경림 시인의 시와 삶’을 2회에 결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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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시인은 가난으로 얼룩진 고향 생활을 훌훌 털고 서울로 향했다. 새 보금자리는 홍은동 산 1번지. 말이 산 1번이지 무허가촌이었다. 괴짜 시인 김관식이 쌀 다섯 말과 김치를 주어서 시작한 서울살이었다. 그렇게 문간방에 보금자리를 폈는데 바람이 불면 문짝은 문짝대로, 지붕은 지붕대로 아우성을 처대던 곳이었다. 전기는 물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아 새벽이면 아내와 뒷산 골짜기에서 물을 퍼 와야 했는데 집에 와서 물동이를 푸다보면 모래와 흙들이 밑바닥에 가득 차있었다.
“이놈의 거머리 같은 가난…”. 이런 생각 속에서 많은 시간들을 그런 이웃들과 부대끼면서 살았다. 그런 사람 냄새 자욱한 무허가촌에서 주고받던 소주잔, 이웃집 돌잔치 등을 챙기며 시골스럽게 살던 풍경들에 애정이 젖어갔다.
시인은 그 때를 떠올리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로 정들어 살다가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하는 악착스런 사람들이었어. 구경거리도 참 많았어. 방범대장이 쌀집 주인 딸을 데리고 줄행랑을 치는가 하면, 떠돌이 이발사가 가겟집 처녀한테 내놓고 드나들며 아기까지 갖게 한 뒤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편지 조각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형님 아우 하던 젊은이들이 술김에 칼부림을 하는 일 들 해서 일이 안 벌어지는 날이 이상한 날일 정도였어. 그런 게 사는 풍경이고 재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홍은동 산 1번지 시절… 가난 속에 보낸 아내와 할머니
누가 말했던가?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운 거라고. 지독한 가난도 세상 초연할 연륜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한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서는가 보다. 시인은 그곳에서 책 외판원을 하다가 그런 대로 생활이 보장된 학원 강사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겨울이면 신발에 새끼를 묶고 고샅길을 오르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곳에서 꼬박 4년을 버티다가 안양으로 이사했다. 안양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돼 간 듯 했으나 이곳에서 유신과 긴급조치 시절의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통원치료와 한방 치료를 하며 힘겹게 버텨온 아내가 세상을 떴다.
아내를 선산에 파묻고 내려온 날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일년이 지나 장터추억에서 빼놓을 없는 인물인 그이의 할머니마저 이승을 떠났단다. 이즈음 시인은 민족사의 애환이 강한, 그리고 서사적 시풍이 도드라진 새재, 남한강, 쇠무지벌, 씻김굿을 통해 민중문학의 가장자리로 들어선다. 민족문학의 진영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일종의 방향타 구실을 한 것이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 피멍든 두 분 억겁년 뜨지 말고 / 잠들라네 날더라 고이 잠들라네"(‘씻김굿’ 중에서). 씻김굿은 전라도에서 많이 하는 굿으로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해 저 세상으로 편히 가도록 비는 것이 목적이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이 깃들어져 있는 이 시는 당시 광주항쟁 후였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는 창작 배경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각종 시위에서 이 시는 슬픈 의식의 하나로 꼭 읊어지곤 했다. 시인은 당시 광주항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직후였지. 전두환 씨는 화해를 화두로 삼아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동원해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고 있었어. 그런데 난 이렇게 생각했지. 인간을 죽인 사람이, 그 칼자루를 쥔 사람이 무슨 놈의 화해는 화해냐고? 그런 화해는 부도덕한 것이다. 그 때 한 신문사에서 나와 몇몇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갖고 대담을 했는데 나중에 그 신문을 보니 내가 주장한 말들을 다 잘라 버렸더군.”
광주항쟁이 일어나면서 양심적 지식인들은 투옥되었고 시인도 두 달 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그 시기에 시인은 재야의 주요 직책들을 맡기 시작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 고문,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지도위원, 민족민주통일운동연합 중앙위원회 위원, 전민련 감사 등. 민족과 문화부흥운동에 동시에 투신했던 시인은 그렇게 늘 질곡의 역사를 비켜서지 않은 채 시대의 한복판에서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삶과 예술을 영위해왔다.
그렇게 비바람을 헤쳐온 한국 대표 민중 시인 신경림은 구순 문턱에서 이승과 작별했다. 생전에 스스로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시인은 1997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란 시를 통해 농무나 겨울밤 파장에 등장하는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 이웃 그리고 농촌 풍경을 통해 진한 향수와 그리움 같은 것들을 잔잔하고 따스하게 노래했다.
갈대에서 시작하여 고난의 세월을 관통한 시인이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다시 생각하는 갈대… 역시 시인에게는 민중 시인이니 참여 시인이니 하는 여러 시각이 공존하지만 영원한 서정시인임이 분명하다. 시인 역시 그러한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바랬다. 시는 역시 시다운 예술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시인의 지론이다. 서정적이면서 참여의식을 내포한 시들을 주로 써온 시인은 요즈음 시들은 철저히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작품세계의 흐름의 변화에 대해 묻자,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은 사람과 사회가 잘 살기 위해 필요하다. 못 살 때는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제 체제가 다르다. 말하고 숨쉴 수 있는 세상이다. 특히 일부 운동권의 지나치게 경직된 사고방식은 고쳐져야 한다. 민족을 너무 앞세우면 예술은 재미가 없어진다. 물론 반민족적인 것은 안 된다”.
그런 시인이기에 다시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에 대해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하자, “시라는 것은 남에게 하는 대화이되, 그것이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해. 또 언어라는 것은 남하고 함께 사는 데서 생긴 만큼 시는 남과 더불어 사는 정서를 담는 것이 중요해. 이것이 중요시되지 않으면 시는 난쟁이처럼 작아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말이 주는 즐거움을 소홀히 해서는 좋은 시를 낳을 수 없어. 시는 본질적으로 절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재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어… 그리고 도덕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그 시는 생명력을 갖기가 어려운 거지….”
“요즈음 젊은이들 체험의 두께 얕고 경솔하게 시 쓴다” 질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거쳐 동국대 석좌교수로 후진양성에도 열정을 쏟았던 시인은 여러 신춘문예 심사를 맡기도 했다. 심사과정에서 느낀 문학 지망생들에 대한 견해를 묻자, “감각은 뛰어나다. 그러나 체험의 두께가 얕고 경솔하게 글을 쓰는 경향이다. 좋은 시를 많이 읽기를 권하고 싶다. 동시대의 시인 몇 편의 시를 읽고 시를 쓰겠다고 덤비는 일은 무모한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시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가 많은데 그것도 좋은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이다. 좋은 시를 모르면서 어떻게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최근 유행하던 3행시에 대해서 의견을 묻자, “하나의 개그에 불과하다. 가짜문학이다.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문학을 많이 훼손할 수도 있다. 시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시는 장난으로 하는 짓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신경림. 시인이 문단에 나온 지도 어언 육십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터와 남한강을 앞에 두고 태어난 탓일까? 온갖 떠돌이 생활을 하며 이 한 세기 한 복판을 강줄기처럼 거슬러 온 인생살이. 그렇게 부대끼며 목이 메여 징 소리처럼 살아왔다. 그런 삶이었기에 분명 시인은 누구보다도 민중을 말하고 노래할 자격이 있을 터.
한편 여담일 수 있지만 예술‧종교‧언론계 사람들은 시인이 충청도 출신이면서도 전혀 지역 색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이야기하곤 한다. 시인에게 이 점에 대한 견해를 묻자, “좁은 국토에서 망국병 지역감정은 없어져야지”라고 잘라 말했고 “우리 고향 뒷산 너머로는 경기도 땅이었고 남한강 건너에는 강원도 땅이었어. 나는 이 경계를 느끼지 못하며 양쪽을 편히 넘나들며 성장기를 보냈어. 모두가 좋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시인은 이 한 세상 한 마음 한 물결을 타고 뜨겁게 그리고 빼어난 서정시의 진수를 선보이며 21세기의 한 복판을 지칠 줄 모른 채 흘러왔다. 아주 당당하게 말이다.
■ 신경림 시인은 ……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58년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첫 시집 ‘농무’가 ‘창비시선’ 1호로 출간됐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달 넘세’,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이 있다. 이밖에 장시집 ‘남한강’과 ‘한국현대시의 이해’,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민요기행’, ‘우리시의 이해’, ‘한국 전래 동요집’ 등의 저서가 있다.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민예총 의장, 대한민국 에술원 회원,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