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삶] 박화목, '보리밭'

보리밭 사이길로 옛 생각 외로워 휘파람 불면…
박상건 기자 2025-04-28 09:42:56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괸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보리밭’ 전문


보리밭(사진-섬문화연구소DB)

괜스레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왔다. 바람결, 새소리, 물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저녁놀 괸 하늘’은 산과 들에서 돌아오는 마을 사람과 황소, 그리고 초가집이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가난했지만, 정겨운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삼시세끼 주식은 쌀과 보리였지만 늘 모자라서 감자, 고구마 등 대체 작물을 섞어 해결했다. 특히, 햇보리 수확 전에 쌀통이 바닥나기 일쑤여서 덜 여문 보리를 볶거나 죽을 써 배고픔을 달랬다. 그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가난은 가난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자연과 더불어 지냈다. 들길의 삘기(삐비,뽐삐) 뽑고 찔레를 벗겨서 추억의 간식거리를 삼곤 했다. 

봄이 오면 유독 ‘보리밭’ 동시가 생각나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작품은 6.25 피난시절 발표됐지만 1970년대에 우리네 농촌과 고향집, 소박한 농민들 얼굴과 오버랩 돼 국민 동요로 불렸다. 

아동문학가 박화목은 1924년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한국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1941년 동시 ‘피라미드’로 등단했다. 그는 피난시절인 1952년 절친 작곡가 윤용하로부터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노래를 만들자는 제안에 작시를 맡았다. 

 
원래 동시 제목은 ‘옛 생각’. 작곡가가 향토적 풍경을 떠올리는 ‘보리밭’으로 수정을 제안해 지금에 이르렀다. 박화목의 또 다른 동시 ‘과수원 길’도 유명한 동요이다. 박화목이 윤영하와 의기투합한 자갈치시장에 ‘보리밭’ 노래비가 있다. 박화목은 한국음악저작권대상 가곡부문 작사가상, 국아동문화대상, 황희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매년 이맘때면 고창, 김제, 군산, 새만금, 보령, 경주, 가파도 등에서 보리밭 축제가 열린다. 축제장마다 그리운 그 시절, 옛 생각을 떠올리며 추억의 노래로 불리고 있다. 여행자들은 청보리밭 너머 지평선, 수평선 풍경도 감상하면서 농부체험, 전통놀이, 보리밭 사이 포토존, 농악 공연, 햇감자 맛 장터, 다양한 농산물 맛보기와 이색 프로그램을 즐긴다. 

바야흐로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의 대한민국은 인공지능 등 첨단시대를 구가하지만, 더우면 더운 대로 익어가는 보리를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즐기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을 감상한다. 그렇게 여행자들은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보리밭을 사뿐사뿐 걷는 것만으로 가벼운 마음과 상쾌함을 체감한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시야도 맑고 평화롭다. 

요즘 보리밭은 융합시대에 걸맞게 메밀도 함께 심고, 해바라기도 함께 심고, 유채도 함께 심어 더불어 색색의 봄으로 재탄생한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도,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자연을 즐기는 여행자도 저마다 보리밭에서 콜라주 기법의 자연을 배우고 깨닫는다. 그렇게 봄은 보리밭을 부르고, 보리밭은 사람들을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추억을 부른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섬TV

박화목, '보리밭'

박화목, '보리밭'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
日・中, 우리바다 넘본 이유

日・中, 우리바다 넘본 이유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인 해양민족이다. 늘 푸른 바다, 드넓은 바다, 3000여 개가 넘는 섬들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자 해양사가 기록되고 해양문화가 탄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 등대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 등대

화성시 전곡항은 시화방조제가 조성되면서 시화호 이주민을 위해 조성한 다기능어항이다. 항구는 화성시 서신면과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방파제가 건
충남 당진시 송악읍 안섬포구 등대

충남 당진시 송악읍 안섬포구 등대

아산만 당진시 안섬포구는 서해안 간척 시대의 어제와 오늘, 서해 어촌이 걸어온 길과 관광 대중화에 발맞춰 섬과 포구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
군산시 옥도면 무녀도

군산시 옥도면 무녀도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신시도에서 고군산대교를 지나면 무녀도다. 무녀도는 선유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장자도와 연결돼 차량으로 고군산군도를 여행
(7) 푸른 하늘, 푸른 잎의 미학

(7) 푸른 하늘, 푸른 잎의 미학

봄이 왔다. 푸른 하늘이 열리는 청명을 지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곡우를 앞두고 봄비가 내렸다. 농어촌 들녘마다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올 농
(7) 떠나가고 싶은 배

(7) 떠나가고 싶은 배

코로나로 모두가 묶여 있은 세상. 떠나고 싶다. 묶인 일상을 풀고 더 넓은 바다로 떠나고 싶다. 저 저 배를 바라보면서 문득, 1930년 내 고향 강진의 시인
(6) 호미와 삽

(6) 호미와 삽

소만은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 절기다. 들녘은 식물이 성장하기 시작해 녹음으로 짙어진다. 소만 무렵, 여기저기 모내기 준비로 분주하다. 이른 모내
박화목, '보리밭'

박화목, '보리밭'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
신경림, '갈대'

신경림,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의 총무, K의 전화를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모처럼의 통화였지만 K의 목소리는 어제 만나 소주라도 나눈 사이처럼 정겨웠다. &ldqu
하와이 제도 <7> 하와이 아일랜드

하와이 제도 <7> 하와이 아일랜드

하와이 아일랜드는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크고 제일 어린 섬이다. 빅 아일랜드라는 별명에 걸맞게 다른 하와이의 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거의 두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