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괸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보리밭’ 전문

괜스레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왔다. 바람결, 새소리, 물소리가 하모니를 이뤘다. ‘저녁놀 괸 하늘’은 산과 들에서 돌아오는 마을 사람과 황소, 그리고 초가집이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가난했지만, 정겨운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삼시세끼 주식은 쌀과 보리였지만 늘 모자라서 감자, 고구마 등 대체 작물을 섞어 해결했다. 특히, 햇보리 수확 전에 쌀통이 바닥나기 일쑤여서 덜 여문 보리를 볶거나 죽을 써 배고픔을 달랬다. 그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가난은 가난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자연과 더불어 지냈다. 들길의 삘기(삐비,뽐삐) 뽑고 찔레를 벗겨서 추억의 간식거리를 삼곤 했다.
봄이 오면 유독 ‘보리밭’ 동시가 생각나는 이유 중 하나다. 이 작품은 6.25 피난시절 발표됐지만 1970년대에 우리네 농촌과 고향집, 소박한 농민들 얼굴과 오버랩 돼 국민 동요로 불렸다.
아동문학가 박화목은 1924년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한국신학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1941년 동시 ‘피라미드’로 등단했다. 그는 피난시절인 1952년 절친 작곡가 윤용하로부터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노래를 만들자는 제안에 작시를 맡았다.
원래 동시 제목은 ‘옛 생각’. 작곡가가 향토적 풍경을 떠올리는 ‘보리밭’으로 수정을 제안해 지금에 이르렀다. 박화목의 또 다른 동시 ‘과수원 길’도 유명한 동요이다. 박화목이 윤영하와 의기투합한 자갈치시장에 ‘보리밭’ 노래비가 있다. 박화목은 한국음악저작권대상 가곡부문 작사가상, 국아동문화대상, 황희문화예술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매년 이맘때면 고창, 김제, 군산, 새만금, 보령, 경주, 가파도 등에서 보리밭 축제가 열린다. 축제장마다 그리운 그 시절, 옛 생각을 떠올리며 추억의 노래로 불리고 있다. 여행자들은 청보리밭 너머 지평선, 수평선 풍경도 감상하면서 농부체험, 전통놀이, 보리밭 사이 포토존, 농악 공연, 햇감자 맛 장터, 다양한 농산물 맛보기와 이색 프로그램을 즐긴다.
바야흐로 세계 경제대국 10위권의 대한민국은 인공지능 등 첨단시대를 구가하지만, 더우면 더운 대로 익어가는 보리를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즐기고 넉넉한 마음으로 자연을 감상한다. 그렇게 여행자들은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보리밭을 사뿐사뿐 걷는 것만으로 가벼운 마음과 상쾌함을 체감한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시야도 맑고 평화롭다.
요즘 보리밭은 융합시대에 걸맞게 메밀도 함께 심고, 해바라기도 함께 심고, 유채도 함께 심어 더불어 색색의 봄으로 재탄생한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도,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자연을 즐기는 여행자도 저마다 보리밭에서 콜라주 기법의 자연을 배우고 깨닫는다. 그렇게 봄은 보리밭을 부르고, 보리밭은 사람들을 부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추억을 부른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