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전문

이육사 시인은 1904년에 태어나 서른 아홉, 불혹의 문턱에 청초한 생을 마감했다. 일제에 항거하며 17번이나 감옥에 갇혔던 젊은 날이었다. 이 시는 그런 고단한 세상살이에도 변치 않은 시인의 청명하고 고고한 삶과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육사는 필명이고, 수감번호 264번에서 따왔다. 본명은 이원록. 시인은 수감생활로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한학자인 이종형 선생 댁에서 지냈다. 사촌형인 이 선생은 포항에서 청포도농장을 운영했다. 현재 그 자리는 해군기지이고, 포항 청림동에 청포도문학공원이 있다.
시인은 모두 34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 시는 1939년 <문장>에 발표했던 작품이다. 시인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청포도가 익어가던 고향마을은 분명 이 시처럼 아름다웠을 게다. 그런 유년의 사랑과 추억이 농장에서 마주한 청포도를 통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꿈들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풍경으로 다가섰을 터이다.
나는 그해 여름날 대부도, 제부도 시골길을 운전하다가 청포도 농장을 만나 이 시를 떠올렸다. 집 근처 마트에 갔다가도 푸른 채소와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파인애플 등이 진열된 코너에서 유난히 이슬 머금은 듯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청포도를 만났다. 포항 호미곶에서 푸른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일본 실습선이 좌초했던 호미곶 등대 앞 바다를 마주하면서 이 시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청포도’는 나에게 색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청포도’는 조국 광복과 평화로운 삶을 소망하는 내용이면서, 색채의 대조적 이미지가 아주 강하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강렬한 푸른색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기도 한다. 식민지 시절 ‘고달픈 몸’과 대조적인 청포도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 묘사됐다. 푸른 빛, 흰 돛단배, 하늘, 푸른 바다, 청포, 모시 수건, 은쟁반 등 시어들은 전체 작품을 더 맑고 밝은 빛깔을 우려낸다.
나는 아버지가 교육자여서 유년시절을 거의 농어촌 분교사택에서 보냈다. 초등 3학년 때는 영암 월출산 아래 농업중고등학교 분교에서 살았는데, 숲 속에 사택이 있고 주위는 온통 농업실습장이었다. 운동장 울타리 겸한 곳이 바로 청포도 실습장이었다. 설익은 청포도를 따 먹는 일은 방과 후의 소일거리였다.
어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정서가 고향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그렇게 “내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계절”이었고, 언젠가는 “내가 바라는 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기다리며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터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