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도는 인천 앞 바다 섬 가운데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섬 면적은 23.46㎢, 해안선길이는 42.2km다. 옹진군에 딸린 섬 가운데 유일하게 승용차로 건너갈 수 있는 섬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여객선을 탔던 영흥도는 2001년에 1.25㎞의 영흥대교가 이어지면서 승용차로 대부도~선재도~영흥도까지 연속 3개 섬을 건너며 섬섬히 출렁이는 섬들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영흥도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중국 상선이 표류하다가 암초에 부딪쳐 침몰 직전에 이르렀는데 큰 바다거북이가 배 밑창을 막아 무사히 영흥도로 피신할 수 있도록 했다. 배를 고친 후 다시 제물포로 항해했는데 그 때 신당(神堂)이 도와준 덕이라고 해서 영흥도라 불렀다 는 것이다. 옹진군청은 이를 근거로 흥미롭게 홍보 중이다.
반면, 해양학자들은 고려 말 익령군이 고려왕조가 망할 것을 알고 온 식구를 끌고 이곳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신령의 도움으로 화를 면해 익령군의 영(靈)자를 따서 영흥도라 불렀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의 섭리가 서린 섬이라는 함의는 빼닮았다.
구전에 따르면 공민왕 후손 익령군은 이태조 탄압을 피해 영흥도에 처음 정착하면서 임씨, 채씨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영흥도에는 유독 평택 임씨가 많다. 영흥도는 1973년에 옹진군에 편입됐고 현재 7000명이 거주한다. 최근 인구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영흥도 포구 진두마을에서 노랑부리 백로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갯벌에서 노니는 모습이 여간 평화로운 게 아니었다. 갯벌은 다른 곳과 달리 높이가 1미터 이상이고 갯벌 사이로 흐르는 강인 갯강이 형성돼 있다.
약 5km 이어진 임도에는 국사봉이 솟아 있다. 고려 말 정국이 불안할 때 왕권이 약했던 익령군이 이곳에 피신해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다고 하여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멀리 인천항을 오고가는 외항선과 작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최규선 스님이 실향민들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며 통일을 기원했다는 통일사도 있다.
임도 아랫도리께 장경리 해수욕장이 있다. 드넓은 자갈해변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이채로운 해변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한 그물 고기잡이 대회’가 열리는 바다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온 가족들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아 카메라 앞에 들어 보이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 추억 사람들이 아른거렸다. 썰물 때는 동죽, 바지락, 모시조개 등을 잡을 수 있다.
해변에는 100년 넘은 소나무들이 울창하다. 500년 넘은 은행나무도 그 곁에 꿋꿋이 서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용담리 해수욕장에는 사계절 여행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적하면서 바지락 캐는 재미가 쏠쏠해서 여행객들이 겨울에도 자주 찾는다. 길게 펼쳐진 갯벌에서 한창 호미를 찍어 쌓는 모습들이다.
이렇듯, 영흥도는 갯벌천국이다. 그래서 굴을 비롯해 바지락이 많이 나고 해변입구와 바닷가로 바지락을 재료로 하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바지락 조개탕, 바지락 칼국수, 바지락 회, 바지락젓갈, 바지락 빈대떡 등등.
십리포 해수욕장은 조용하면서 깨끗한 해변이 특징. 품격을 자랑하는 서어나무 3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룬다. 앞 바다에는 보무당당하게 우리나라 최초 등대가 있는 팔미도가 보인다. 팔미도 등대는 6.25 전쟁 때 맥아더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던 섬. 미군이 조직한 첩보부대 ‘켈로(KLO)부대’가 등대를 탈환, 불빛을 밝히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등대 불빛이 켜지면서 팔미도와 영흥도 사이 바다에 포진한 7개국 7만 5천명의 병력과 261척의 연합군 함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영흥도 사람들은 학도의용군과 기동대로 편성돼 인천 월미도로 함께 진격했다. 영흥도에는 그 때 작전 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위해 위령탑이 세웠고 현재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영흥도는 역사적 현장의 섬이다. 삼별초 거점으로 70여 일간 몽고에 대항했던 섬이기도 하다.
십리포 겨울바다를 걷는 연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해변에는 나무 벤치가 마련돼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홀로 사색하는 사람, 바다에 취한 연인들 모습까지 자연 속에 하나 된 모든 사람이 하나의 풍경화가 됐다. 그렇게 영흥도는 추억과 사색의 바다로 안성맞춤임이다.
영흥도는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아 여름철 해수욕하기에도 좋고 썰물 때는 고동과 낙지 ‘박하지’라는 게를 잡을 수 있다. 해수욕장을 빠져 나오는데 마을 논바닥 한 귀퉁이 얼음판에서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었다.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눈발로 날리는 썰매 현장이었다. 농업과 어업활동을 병행하는 이른바 반농 반어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속 중 한 장면이다.
썰매는 두꺼운 판자를 대어 만든 것도 있지만 비닐 포대기에 엉덩이만 붙여 미끄러지던 맛도 괜찮다. 썰매는 서르매, 산서르매, 설매 등으로 불렸다. 한자로 설마(雪馬), 성응(雪鷹)에서 알 수 있듯 말이나 매처럼 빠르게 눈 위를 달린다는 의미다.
영화 속에서 보던 미국 알래스카주, 캐나다 앤티코스티섬 설원을 달리던 개썰매도 아련하다. 세월이 흘러 전동식 눈썰매(스노우카)도 등장했다. 물건을 나르기 위해 바닥을 둥글게 깎아 휘어 앞뒤를 위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선조들은 수원성곽, 창경궁, 창덕궁 재건공사 때 썰매를 이용하기도 했다.
발에 신는 썰매는 스키 부리처럼 앞쪽을 위로 들려지도록 굽혔다. 중간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발을 꽉 죄도록 고안했는데 강원도 산간지방에 주로 이용했다. 어린이 놀이로 쓰이던 것은 엉덩이를 적당히 붙일만한 판자에 각목을 대에 그 밑은 쇠줄을 박아 얼음판에서 스르르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썰매를 미는 도구는 송곳이 박힌 나무로 얼음판에 찍어 앞으로 나가고 방향을 틀거나 브레이크를 잡을 수 있다.
영흥도에는 무인도 어평도가 있다. 고기가 많이 잡히고 물이 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배들이 드나드는 시기에 고기가 많이 나는 뻘이라는 뜻의 ‘어뻘’에서 유래했다. 어평도에는 210종 생물이 사는데 노란 장대, 소사나무, 모감주나무, 만주 고로쇠, 금방망이 등 특이한 식물이 많다. 특히 해변에 소사나무, 산벚나무 군락지, 갯메꽃, 갈대 등이 서식한다. 가마우지, 노랑부리백로, 노랑할미새, 바다직박구리도 발견됐다.
영흥도에서 11.8km 거리 무인도 부도가 있다. 부도등대 주변은 유명 낚시 포인트다. 우럭과 노래미가 많이 잡힌다. 이 일대 바다는 사계절 수많은 어선과 낚싯배들이 장관을 이룬다.
그렇게 다양한 식물과 낚지, 조개 등 수산물이 풍부하고 해양체험이 가능한 섬, 아기자기한 어촌문화가 어우러진 섬, 바다도 여행자 마음도 풍요롭게 출렁이고 생동하는 섬, 그 영흥도로 한번 떠나보면 어떨까. 문의: 영흥면사무소(032-886-7800)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