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근원적인 감각을 채집하면서 이 세계의 구원과 혁명의 가능성을 묻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여 온 송종찬 시인이 맛깔스러운 문장이 돋보인 산문집을 펴냈다.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이라는 제목으로 삼인 출판사에서 펴낸 이 책은 첫 장부터 흡인력이 대단했다.
프롤로그에서 “안가강 위로 동이 떠오르며 새벽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창문을 여니 자작나무들이 통나무집을 에워싸고 있었다. 안개가 점점 강 끝으로 물러나면서 자작나무의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간밤 자작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을 잔 것이다.”(9쪽)
시인이 감각적 기법으로 집필한 탓에 문장 마디마디마다 은유와 운율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읽는 맛이 쏠쏠하다. 시적 묘사와 함축적인 문장을 구사함으로써 여느 산문집보다 색다른 감칠맛이 우러난 게 특징이다. 시인이 구사한 그 문장 숲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누비는 바이칼호수 등 러시아 여행 현지에 있는 것처럼, 동행하고 있는 듯 아름다운 풍광들이 생생한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점에서 평화와 혁명은 비슷하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고, 사랑이 없는 혁명은 정의롭지 못하다…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특별한 이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대의 공유된 코드였다.…입시에 억눌렸던 사랑의 감정이 혁명이라는 단어 앞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곤 했다”(24쪽)
이 책은 그저 감상에 치우치지만은 않았다. 한 지식인의 언중유골과 솔직담백함 때문에 글쓰기의 진정성까지 담보해냈다.
송 시인은 러시아 혁명가 레닌과 이내사라는 연인을 언급하면서 “두 사람은 사랑을 통해 혁명에 가닿았고, 혁명을 함께하며 사랑의 불씨를 키워 나갔다”고 말했다.
혁명과 사랑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동일성의 원리로 환치할 수 있을까 싶다. 서정적 문장 기교의 파문은 이 책 페이지마다 가득가득 은빛 물살로 출렁였다. 문장의 속살을 따라가는 작은 물결인가 싶으면 강의 이미지로 이어지고 거대한 강인가 싶으면 다시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고 노을이 지면서 영화처럼 암전과 반전을 반복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로마와 몽골, 오스만의 지배, 크림전쟁, 제2차 세계대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빼앗기고 빼앗기는 역사가 이어졌다. 내륙으로 움푹 들어간 바다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장이었다.…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곳도 활약한 곳도 머나먼 크림반도였다. 병사의 마지막 죽음을 거두는 손길은 종교적이었다. 죽음 앞에서 아군도 적군도 없었다. 기념탑 주위를 어지럽게 돌고 있는 갈매기 부리에 노을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60쪽)
이 책은 이처럼 시종 서정적 묘사와 역사적 관점으로 다양한 접근법을 시도하면서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시인의 아들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아버지의 넓고 깊은 마음을 반추하게 한다. 시인은 런던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아들에게 3백 달러를 쥐어주면서 이렇게 독백을 내뱉었다.
“나도 아들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다. 더 이상 간섭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기로 했다. 철부지일 줄 알았는데 3일 동안 여행하면서 아들은 이기적인 나보다 훨씬 인간적인 내면을 갖추고 있었다. 그간 부모에게 대들었던 것은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아들과 함께한 사흘 동안 서로의 짐을 들어주고 차를 함께 마시며 우리는 서로의 국경을 넘나들었다”(98~99쪽)
아버지의 마음을 시로도 발표한 바 있는데 ‘마음의 국경’에서 “유로라인 버스를 타고/아들과 처음으로 나선 둘만의 여행길/한방에 둘만 누워 있는 게 서먹서먹하다/한집에 살면서/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았던 것일까//(중략)//자정 넘은 공항 대합실/처음으로 들어본 아들의 심장소리//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행이 끝나면 결국 몇 장의 장면만 남는다. 가슴 속에 이미지로 자리 잡든, 컴퓨터파일로 남든 한두 장의 스케치로 요약된다. 이미지는 여행 중에 보았던 아름다운 풍광이거나 사람 사는 모습 일 수 있다. 여행을 끝내고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다녔거나 가볼 필요가 없는 곳을 여행했을 가능성이 높다.”(120쪽)
송 시인은 톨스토이 마지막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했다.
“바랑 하나만을 메고 낡은 기차를 타고 그는 폐렴에 걸려 작은 기차역인 아스타포프역(현재는 톨스토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깊은 눈, 휘날리는 수염, 그는 떠났지만 그는 우리 곁에 남았다. 가지고 있는 전 재산과 심지어 문학과 사상까지 버림으로써 불멸이 되었다. 만약 톨스토이가 50대 이전에 누렸던 욕망을 지속했다면 지금처럼 위대한 작가로 남을 수 있었을까.”(143쪽)
그렇게 문학도 인생도 버리고 비움으로써 불멸의 영혼으로 빛난다. 그런 영혼과의 만남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떠난다. 그래서 여행은 또 하나의 인생이고 그 여정이 나그네 길이다.
송종찬 시인은 고려대에서 러시아문학을, 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 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시집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 ‘첫눈은 혁명처럼’ 등이 있다.
송 시인은 2011년부터 4년여 동안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의 지극한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 외국문학도서관 부설 루도미노출판사에서 러시아어 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을 출간했고 러시아 루스키 미르재단의 초청작가로 선정됐다.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