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화제] 우리 땅 독도의 산증인 제주해녀들 70년 만에 독도 방문

한규택 기자 2022-08-19 13:16:14

이여싸나 이어도사나 이여도사나 (이어도사나)
요 넬 젓엉 / 어딜 가리 (이 노를 저어서 어디를 가리)
진도바당 / 한골로 가세 (진도바다 큰 물로 가세)
한착 손엔 / 테왁 심고 (한 쪽 손에 테왁을 들고)
한착 손엔 / 빗창 심어 (한 쪽 손엔 갈고리 들어)
한 질 두 질 / 들어간 보난 (한 길 두 길 들어가보니)
저도가 / 분명허다 (저승이 따로 없네)
이여도사나 / 쳐라 쳐라 (이어도사나 /저어라 저어라)
한 목 지엉 / 어서나 가자 (한 목 잡으러 어서나 가자)

제주도 해녀들이 물질을 하거나 노를 저으면서 불렀던 노동요이자 구전 민요인「이어도사나」의 한 대목이다. 어렵고 힘든 물질을 하던 해녀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이 노랫가락이 70년 만에 독도 바다에 다시 울려 퍼졌다.

독도 물질을 나서며 찍은 단체사진(사진=경북도 제공)

지난 18일 제주 해녀 34명이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도를 방문했다. 70여 년 전 열악한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일하면서 독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제주 해녀의 독도 개척사를 살펴보고, 관련 내용을 수집, 정리해서 독도 영토주권 강화를 위해 활용하고자 경북도가 기획한 행사의 일환이다. 이 중에는 1950~60년대 독도에서 실제 물질을 했던 김공자씨 등 해녀 4명도 포함돼 그 의미를 더했다.

제주 해녀박물관 등의 자료에 따르면, 제주 해녀의 독도 조업은 일제 강점 말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됐고, 광복 이후 한국인 선주들에 의한 미역 채취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 10명 이내였던 제주 해녀의 독도 조업은 1950년대 후반에는 20~40명으로 규모도 확대된다.

해녀 김공자씨와 새끼 강치(사진=경북도 제공)

초기에는 주로 제주 한림지역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갔는데, 그 증거로 한림읍 협재리 마을회관에 1956년 건립된 ‘울릉도 출어부인 기념비’가 남아 있다. 비석 옆면 비문에는 ‘객고풍상/성심성의/애향연금/영새불망’(客苦風霜/誠心誠意/愛鄕捐金/永世不忘, 객지에 나가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사랑하여 돈을 내놓았으니 성실한 마음과 성실한 뜻을 영원토록 잊지 않으리)이라고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독도로 출가물질을 다녀온 23명의 해녀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다.

제주시 한림읍 마을회관 앞에 설치된 '울릉도 출어부인 기념비'(사진=경북도 제공)

제주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독도에 건너가게 된 계기는 독도의용수비대의 해녀 모집이었다. 일본이 광복 후 수시로 순시선을 보내 독도에 대한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1953년 한국전쟁을 틈타 독도에 ‘일본 땅’이라는 푯대와 어업 금지 팻말을 세우는 등 독도를 수시로 불법 침탈하자 울릉도 청년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독도 사수를 위한 자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미역 채취를 시작했고, 이에 제주 해녀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해녀들은 독도 서도에 지하수가 샘솟는 큰 동굴인 몰골에서 생활했다. 가마니를 이용해 임시 숙소로 삼고, 지하수로 식수를 얻으며 한 번에 수십 명이 들어가 2~3개월씩 거주하면서 미역을 채취하고 널어 말렸다.

제주 해녀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하던 몰골(사진=경북도 제공)

제주 해녀들의 독도에서의 어업 활동에 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비록 생계를 위해 수비대에 고용된 노동자였지만 일본의 침탈 야욕에 맞서 독도에 상주하는 독도의용수비대와 함께 독도 지킴이에 큰 일조를 했다. 해녀들은 독도 동도 정상에 막사를 설치하고 독도 사수에 들어간 수비대가 먹을 물이 떨어져 곤경에 처했을 때, 서도 몰골에서 물을 실어 동도에 살던 대원들에게 전달했다. 또 높은 파도로 울릉도 보급선이 독도에 접안할 수 없어 대원들이 아사 직전의 위기에 놓였을 때도 해녀들이 풍랑 속에 뛰어들어 식량을 조달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3년 이상 독도에 주둔하게 된 것도 제주 해녀들의 숨은 노력과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해녀 물질(사진=섬문화연구소DB)

이처럼 독도 바다의 거센 풍랑의 헤치며 생업을 이어가면서 독도를 지켜낸 제주 해녀들은 독도의 실효적 지배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우리 땅 독도의 산증인이다. 그 강인한 정신이 70년이 지난 오늘 독도에 다시 살아 숨쉬고 있다.

70년만에 독도를 방문한 제주해녀들(사진=경북도 제공)

섬TV

서정춘, ‘랑’

서정춘, ‘랑’

랑은이음새가 좋은 말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사랑하기 좋은 말 - 서정춘, '랑’ 전문 팔순 고갯마루의 서정춘 시인이 제 7시집 ‘랑&rsq
박화목, '보리밭'

박화목, '보리밭'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저녁
日・中, 우리바다 넘본 이유

日・中, 우리바다 넘본 이유

대한민국은 3면이 바다인 해양민족이다. 늘 푸른 바다, 드넓은 바다, 3000여 개가 넘는 섬들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자 해양사가 기록되고 해양문화가 탄
서해 끝섬, 격렬비열도

서해 끝섬, 격렬비열도

서해 끝섬, 서해의 독도인 격렬비열도. 정부가 국무회의를 통해 격렬비열도를 국가관리연안항으로 지정한 7월 4일이 ‘격렬비열도의 날’이다.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

우리나라 최남단 섬 마라도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마라도. 남제주군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푸른 물결 퍼 올리며 달리는 배의 저편에 한 폭의 수채
서해 최북단 백령도 해안선 풍경

서해 최북단 백령도 해안선 풍경

서해 최북단의 섬, 백령도. 백령도는 북위 37°52′에 걸쳐 있는 섬으로 2㎞ 앞이 38선이다. 백령도는 인천항에서 북으로 222km 해상에 있다. 쾌속선으
(7) 푸른 하늘, 푸른 잎의 미학

(7) 푸른 하늘, 푸른 잎의 미학

봄이 왔다. 푸른 하늘이 열리는 청명을 지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는 곡우를 앞두고 봄비가 내렸다. 농어촌 들녘마다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올 농
(7) 떠나가고 싶은 배

(7) 떠나가고 싶은 배

코로나로 모두가 묶여 있은 세상. 떠나고 싶다. 묶인 일상을 풀고 더 넓은 바다로 떠나고 싶다. 저 저 배를 바라보면서 문득, 1930년 내 고향 강진의 시인
(6) 호미와 삽

(6) 호미와 삽

소만은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 절기다. 들녘은 식물이 성장하기 시작해 녹음으로 짙어진다. 소만 무렵, 여기저기 모내기 준비로 분주하다. 이른 모내
오세영, ‘바닷가에서’

오세영, ‘바닷가에서’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갈밭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의 총무, K의 전화를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모처럼의 통화였지만 K의 목소리는 어제 만나 소주라도 나눈 사이처럼 정겨웠다. &ldqu
하와이 제도 <7> 하와이 아일랜드

하와이 제도 <7> 하와이 아일랜드

하와이 아일랜드는 하와이 제도에서 가장 크고 제일 어린 섬이다. 빅 아일랜드라는 별명에 걸맞게 다른 하와이의 섬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거의 두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