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사람들 사이 일로 부대끼다 못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때 마음이 먼저 날아가 닿은 곳은 마침 ‘섬사랑시인학교’ 덕적도 캠프였다.
인천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가니 이름처럼 깊고 큰 물 지는 바다에 덕적도가 있었다. 서해 섬이래야 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영종도, 작약도 외에는 가본 곳이 없었다. 그래서 덕적도를 품고 있는 깊고, 맑고, 먼 바다는 신비로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착장 가까이서 바라본 덕적도는 해송이 아닌 적송이 울창한 산이어서 멀리 건너온 바다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묘한 일이었다.
선착장에서 펜션이 제공하는 자동차를 타고 숙소에 닿았을 때 바다는 해안 가까이 밀려와 있었다. 여장을 풀고 바닷가로 나왔을 때는 숙소 뒷산에서 내려온 어둠이 어느새 바다 위를 까맣게 덮은 뒤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파도소리는 더욱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파도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갈라터진 마음을 어루만져주기에 충분했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새 밤바다는 내 안으로 밀물져 들어와 일렁였다. 일렁이는 바다 속에 뭍에 두고 온 한 사람이 확고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이튿날 이른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동쪽 하늘이 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누가 불러내기라도 하듯 그대로 달려 나갔다. 선착장 끝에 서니 멀리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푸른 바다를 사방으로 두른 외딴 섬의 적송 숲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아름답던지! 지구상에 해가 뜨지 않는 곳이 없으련만 ‘서해’ 하면 일몰만 생각하던 고정관념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던지! 바닷가 그 아침, 한 사람이 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덕적도는 뭐니 뭐니 해도 천연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매년 100여명이 몰리던 섬사랑시인학교는 이번에는 조용히 치르자는 취지에서 회원 중심으로 가족적 분위기로 진행됐다. 스물도 채 안 되던 ‘섬사랑시인학교’ 식구들과 함께 갔던 밭지름 해수욕장은 휴가철이 다 끝난 뒤라 그런지 한적했다.
해안가에는 자치단체에서 세운 듯한 이정표에는 ‘밧지름 해수욕장’이라 쓰여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쓴 듯한 팻말에는 ‘밭지름 해수욕장’이라 쓰여 있었다. 밭을 가로질러 가는 해수욕장이라는 데서 이름이 나왔다고 하니 아마도 ‘밭지름 해수욕장’이 맞지 않나 싶었다.
아무튼 밭지름 해수욕장 가에는 수 백 년 묵은 적송 숲이 있었는데 따로 텐트를 치지 않아도 될 만큼 우거져 있었다. 숲 그늘에 들어 바다 바람에 휘어진 채 제각각 자란 소나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아름다웠다. 또한 휘어진 노송들의 가지 사이로 맑고 푸른 바다를 눈이 시리도록 보았다.
서해 바다는 흐리다는 나의 고정 관념을 씻어내려는 듯 덕적도 바다는 햇빛을 투과시킨 푸른 파도를 연신 밀어내고 있었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더구나 경사가 완만하여 수심이 1.5m 내외인 곳에서 아이들이 마음 놓고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사람으로 치면 마음이 넓어서 곁에 사람을 가까이 두는 한편 속이 깊어서 알아갈수록 깊이 빠져들게 하는 사람, 즉 덕이 많은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나는 그날 덕적도 큰물에 홀딱 반하고 말았다. 덕적도는 적송 숲의 송뢰 같은 목소리와 사람을 가까이 머물게 하는 선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속내를 갖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닷가 해당화 군락이다. 왜 노래도 있지 않은가. ‘해~당화 곱게 피~는 섬~마을에~’로 시작되는 노래. 열매나마 바닷가의 해당화를 보니 반가웠다. 바닷가 백사장에 해당화 꽃이 만발했을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데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옆 사람의 말이 들렸다.
다홍빛으로 잘 익은 것 두 개를 따서 먹어보았더니 달콤했다. 의외였다. 해당화 군락을 보는 순간 해당화의 쌉싸름한 꽃향기가 코끝에 감도는 듯 하여 열매도 씁쓰름하리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해당화 열매에는 진통성분이 있어서 약재로 쓰인다는 말도 들렸다. ‘열아홉 살 섬 색시’의 씁쓰름한 사랑도 끝내는 달고 신통한 열매를 맺었기를.
세월이 지나도, 지금도 큰물섬 덕적도가 그립다. 그 사람이 그립다. 꽃 피는 봄이 오면 그 섬에 다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가서 봄 바다 연푸른 물빛을 배경으로 선 적송 숲 아래 꽃분홍색 얄프레한 홑꽃잎을 펼치는 해당화를 보고 싶다. 그 사람의 웃음을 보고 싶다. 해당화의 알싸한 향기에 취해 적송 숲을 거닐며 봄 바다 물빛을 한없이 바라보고 싶다. 그때쯤에는 아릿하게 망울져 있는 내 사랑도 활짝 피어있으리라.
이은경(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