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전문
한국적 토착정신이 시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다. 국적 불문의 은어와 사적 말장난이 ‘스토리텔링’으로 포장돼 가락 없는 노래들이 아우성친다.
서정춘 시인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은 이즈음 문학풍토와 세태를 곱씹게 하면서 토속어의 맛과 언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이 시는 ‘봄, 파르티잔’, ‘캘린더 호수’ 시집에 실려 있다. 한국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엮은 100명의 시인들이 쓴 방언시집 ‘요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에도 실려 있다.
서정춘 시인은 군더더기 없는 단어로 함축적인 시를 선보인다. 간단한 문장에서는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이 연출된다. 특히 전라도 방언을 통해 농촌 풍경과 추억과 친근감을 동시에 재현했다. 마치 ‘TV문학관’이나 ‘전원일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을 준다.
농촌 고유의 정취를 진하게 풍기는 방언인 ‘남새밭’은 채소밭, ‘찌끌다’는 끼얹다, ‘어덕배기’는 언덕, ‘떽기칼’은 공식 사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화살촉처럼 만들어진 칼을 말한다. 이 칼은 농촌에서 부엌의 식칼, 들판의 낫 다음으로 다용도로 많이 사용한 칼이다. ‘몽당손’은 사고로 손가락이 잘린 손이다.
코로나19로 민초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시대보다 더 가난하고 투박한 삶으로 하루살이를 이어가던 시절의 풍경화다. 그 시절 풍진세상의 농촌 풍경인데도 정겨운 미소와 희망과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한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정순이가 등장해 여한 없는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안분지족이다. 가난이 몸에 익은 문학 소년은 백석시집을 빌려보려 고개를 넘는다. 읍네 서점으로 새 책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빌리려 가는 길인데도 그 뒷모습은 너무 행복에 겨웠다. 동구 밖에서 깨금박질 하다가 이내 꼬불꼬불 산길 돌고 돌아가며 땀방울 훔쳐내곤 하지만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백석 시인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본명은 백기행이다. 오산고보 졸업 후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母와 아들’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월이 가락을 통해 노래한다면 백석은 묘사를 통해 ‘이야기 시’를 썼다. 묘사, 순우리말 구사, 짜임새 있는 구성, 반복되는 문장의 운율감 등이 특징이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