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는 예술 · 미술 · 판소리 · 강강수월래 · 고려시대의 삼별초항몽전적지 · 홍주 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통문화와 예술, 그리고 유배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진도는 해남에서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기에 진도 본도는 섬이 아니다.
전국의 유배지 가운데서 진도는 왕의 특별한 분부가 있어야 유배지로 배정되는 혹독한 형벌의 땅이었다. 그래서 제주도ㆍ완도ㆍ남해도ㆍ거제도ㆍ흑산도와 함께 진도는 왕의 특명으로 중범자가 유배되는 외딴 섬의 절도정배(絶島定配)의 지역이 되었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뚫리고 연륙교가 놓여서 쉽게 왕래가 가능하지만 옛날 서울에서 귀양 가는 사람들에게 진도는 1.500리가 넘는 멀고 험한 절해고도였다.
이런 이유로 진도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유배자가 쫒겨간 ‘유배1번지’가 되었다. ‘역사의 응보’라 할 것인가. 혹독한 유배지에는 쫒겨온 선비ㆍ학자들로 인해 학문과 예술이 꽃피게 된다. 진도가 그런 대표적인 곳이다.
진도의 명승지는 조선 세종대왕 때에 세워진 진도읍 교동리의 진도향교, 선조 때에 건립되었던 봉암서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도아리랑, 중요무형문화재인 강강수월래, 항몽근거지 용잠산성, 19세기의 대화가 허(許)간에서 허형(許瀅), 허백련(許百鍊)으로 이어진 남도화가의 큰 산맥, 이들의 작품이 보관ㆍ전시된 운림산방(雲林山房), 울돌목의 명랑대첩 등 끝이 없다.
진도가 유배문화의 전통 또는 유산이라 할 것 중에는 이 지역 고유한 민요가 있다. ‘진도 아리랑’ · ‘강강수월래’와 함께 ‘들노래’ㆍ‘뱃노래’ㆍ‘살쾡이’ㆍ‘상여소리’ㆍ‘둥덩이타령’ㆍ‘보리타작노래’ㆍ‘맷돌질노래’ 등이 그것으로서 지금도 전승되어 민요의 보고가 되고 있다.
예로부터 진도사람으로 소리 한 가락 못하면 진도가 고향이 아니라 하고, 밭매는 여인들이 지나가는 남자의 길을 막고 소리를 청해서 노래를 하지 못하면 창피를 준다는 말이 전할만큼 민요가 널리 보급되고 전승되고 있다. 유배지에서 최상의 문화ㆍ예술이 탄생하는 묘리, 이래서 역사와 세사(世事)에는 묘미가 있는 것일까. 고려시대 이래 한말까지 진도에 온 유배자는 기록에 남아있는 사람만도 100명이 훨씬 넘는다. 국립목포대학박물관이 전라남도와 진도군의 협찬으로 1987년에 조사한 고려ㆍ조선시대의 유배자는 113명이다.
진도에서 100명이 넘는 유배자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0~1590)이다. 소재는 조선 중종에서 선조때의 문신ㆍ학자로서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ㆍ수찬(修撰)을 거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소재가 중앙정계에서 쫒겨나 기나긴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을사사화 때문이다. 1545년 인종 즉위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대립하다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면서 조정은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인종이 8개월 만에 죽자 12세의 명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문정대비의 수렴정치와 함께 소윤이 정권을 잡았다. 이에 대윤일파는 역모죄로 몰려 윤임 등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이른바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다.
소재는 1547년 을사사화로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 해 9월 진도군 지산면 거제리로 이배되었다. 3년 동안 거제마을에서 지산면 안치마을로 다시 이배되어 여기서 16년을 살았다.
안치마을은 진도읍에서 8km쯤 떨어진 소포만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소재가 유배되었을 때에는 섬 중의 섬으로 바닷물이 마을을 휘돌아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30여 년전만 해도 이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로 이곳 소포만을 건너야 했다고 한다.
지배세력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전국의 오지를 샅샅이 조사하여 급수를 매기고 유배지로 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정성, 노력으로 외적의 침입로를 찾고 예방했다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강화도조약 따위의 굴욕과 국치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저래 진도는 꼭 한번 찾아 볼만한 역사의 현장이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