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건 시인의 '섬을 걷다'] 새떼처럼 모인 섬들 사이를 밝히는 하조도등대

거친 숨소리를 퍼 올리며 계곡물처럼 흐르는 조류를 바라보며
박상건 기자 2019-12-17 16:23:38

그날 밤 11시,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섬문화연구소 조도군도답사팀 일행은 전남 진도 조도로 향했다. 새벽 4시 목포에 도착,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후 다시 진도로 향했다. 팽목항에서 아침식사 후 7시30분 첫배를 타고 조도군도를 향했다. 조도는 팽목항에서 40여분 걸린다.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일행들처럼 해무 낀 섬들은 눈곱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희끗희끗 시야를 스쳐 지났다. 마침내 조도 도리산 전망대에 오르니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정말 그림 같았다. 푸른 바다에 분재를 전시하는 듯... 

새떼처럼 모인 조도군도

우리나라에는 조도라는 이름의 섬이 여섯 군데 있는데 모두 새를 닮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도의 조도는 많은 섬들이 새떼처럼 흩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북쪽은 ‘상조도’, 아랫녘 섬은 ‘하조도’이다. 두 섬은 다리로 연결돼 있다. 좌우 바다 끄트머리에 신안군과 완도군의 섬들이 펼쳐진다. 날씨 좋은 날엔 한라산도 보인다. 

선착장이 있는 어류포에서 마을로 들어서자 밭들이 참 많았다. 반농반어촌의 주민들은 특산품인 무와 대파를 캐고 있었다. 바다일이 없으면 뭍에서 일하고 밭일이 없으면 바다에 나가 멸치와 낙지, 매생이, 전복, 김 등 해산물을 채취한다. 문화재로 등록된 동구리에는 성터가 있고 방지구리해변은 갯돌과 모래, 갯벌이 함께 산수화 같은 신비의 바닷가를 자랑한다. 

다리로 연결된 상조도와 하조도 전경

어선을 빌려 타고 154개의 섬 중 조도군도의 70여개 섬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이따금 작은 포구로 들어가 갓 잡아온 싱싱한 감성돔과 숭어 그리고 소라와 해삼, 멍게 등을 구입해 갑판에서 식사를 대신했다. 이런 맛이야말로 섬 여행에서 맛보는 매력 중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 일대 해역은 감성돔 낚시 포인트로 유명하다. 

1년에 5일 정도만 날이 좋아 갈 수 있다는 추자도 위 병풍도 일대 무인도를 향했다. 세월호 사고가 난 해역이다. 그날도 우리 일행을 태운 어선 역시 엔진 고장으로 소용돌이치는 조류에 휩쓸려가다가 물길이 멈춘 어느 무인도 기슭에 정박했다. 선장 박영규 씨는 “섬들이 모처럼 서울에서 온 손님들을 오래 잡아두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씩 웃으면서 엔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청등도, 신의도, 관매도, 죽도, 맹골도, 서거차도, 동거차도, 내병도, 외병도, 병풍도를 거쳐 기암괴석이 점점이 늘어선 무인도 등을 항해했다. 

계곡물처럼 소쿠라지는 흑석여 무인등대

거친 숨소리를 퍼 올리며 흐르는 조류가 지나고 나면 그 자리는 다시 아담한 호수처럼 평온했다. 이처럼 바다와 섬, 섬과 섬 사이는 늘 적당한 수온과 기류가 넘나들고 있었다. 그런 자연의 이치를 순응하며 섬과 섬사람들도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인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조도군도는 외유내강의 섬이다. 관매도 섬마을에 내려 잠시 해변을 거닐었다. 어장에 나가 돌아오는 어부 부부를 만나 포구에서 성게와 해삼을 구입한 후 다시 정박한 배 위에서 한 잔 술잔을 주고받았다. 추억으로 출렁이던 바다는 다시 노을로 채색되어 갔고 섬들의 유혹을 뒤로한 채 신전리 백사장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주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잊을 수 없는 조도여행의 첫날밤은 깊어갔다. 전라남도는 세계적인 섬 풍광을 자랑하는 이 섬들을 국제적 관광 상품인 크루즈여행코스로 개발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었지만 여러 법규 제약으로 뜻을 접었다. 주민들은 펜션 등 숙박 편의시설을 마음대로 지을 수 없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규제의 덫에 실망과 아우성이 교차했다.

정작 아름다운 남도의 섬을 보유하고도 고향을 하나 둘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일행은 상경 길에 도지사 사택을 찾아가 이런 주민여론을 전달하기도 했다. 함께 한 주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진 것은 돈벌이가 난감하기 때문”이고 “주민도 여행자에도 좋은 다도해 정책을 만들어 달라”고 도지사에게 건의했다. 

하조대 등대

첫날밤은 잠 못 이뤘다. 민박집에서 뒤척이다가 새벽에 방파제로 향했다. 양식장을 양날개로 낀 소섬에 아침 해가 떠올랐다. 방파제 아래서는 할아버지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볼락 몇 마리를 잡은 할아버지는 새벽잠이 없어 이 시간에 이곳을 찾곤 한단다. 할아버지는 “저기 저 각흘도는 화가들이 자주 찾는 섬인데 어제 낚시꾼들이 참돔 60마리나 잡았다”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낚은 고기를 다시 바다로 놓아주었다. 그리고 대나무 낚싯대를 메고 귀가했다. 문득, 인생이란 저렇게 버리고 비우면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판 ‘노인과 바다’를 연상하며 굴곡의 인생살이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4km의 비포장 산길을 따라가자 창유리 산1번지 끝자락에 하조대등대가 있었다. 

능성에서 바라본 하조대 등대

하조대등대는 1909년 2월에 세워진 109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이곳 등대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조도의 전경을 한 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 울돌목에서 명량해협을 펼쳤는지 역사의 한 단면도 깨닫게 해준다. 물길이 계곡물처럼 쏟아지고 뒤틀리며 흐르는 장죽도 수로 위쪽으로는 48m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곳에 백색원형의 하조대등대가 있다. 등탑의 높이는 12m인데 낚싯배와 여객선의 항해 이정표가 되고 여행객들에게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일대는 서남해 연안해역에서 사장 유속이 거센 지역으로 등대는 선박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특히 해상교통요충지로써 해상교통관제서비스를 위한 레이더 기지국도 운영하고 있다. 

전망 좋은 섬이라는 것은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등대의 존재 이유이다. 진도는 1350년 왜구의 침입에 따라 치소를 영암으로 옮길 정도였다. 하조도등대 등대원으로 근무했던 이춘웅 선생의 증언을 이랬다. 

“6.25을 만나서 지방 빨갱이들과 정보대원, 비밀요원, CIA대원들이 수시로 등대를 찾아와서 몰래 접견했습니다. 빨갱이는 빨갱이대로 서로 접근했지요. 하지만 누가 누군지 잘 몰랐어요. 6.25가 터지자 지방 빨갱이들이 나타나 그 지방 면장, 교장, 선생님들, 유지 등 7명을 방파제에서 죽였어요. 6명이 죽고 그 중에서 박 면장 한 사람만 숨어 있다가 살아 나왔어요. 죽도 등대장도 빨갱이한테 반 죽었다가 살았지요.” 

하조대 등대상

그만큼 등대와 등대원의 역할은 중요하다. 전쟁에서 어느 쪽이든 등대는 전략적으로 필요한 시설이었으니 등대원의 목숨을 함부로 헤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하조대 등대 앞바다는 아무 일 없는 듯 그런 역사의 스토리를 깊은 조류에 흘려보내면서 수면 위로는 햇살 몇 주먹 뿌리면서 찬란하고 평화로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었다.   글・사진: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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