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방송・통신・잡지사 소속 언론인들의 해양포럼인 ‘해양생태계 연구 언론인회’(해언회. 회장 박상건)는 14일 11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정기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등대는 램프와 렌즈를 이용해서 불빛을 비추도록 만들어진 탑 또는 건물을 말한다. 등대는 밤에 항해나 바다의 수로 안내를 돕는 역할을 하며, 주로 항구, 해변의 방파제, 외딴섬 등에 세워진다. 안개가 짙어서 시계가 불분명할 시엔 등대에 설치된 공기압축기를 이용하거나, 레이다 비콘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날 인천해양수산청 이영태 항로표지과장(공학박사)은 ‘등대의 역할과 의미’주제로 주제발표를 했다. 이 과장은 “인간이 강이나 바다를 무대로 생활하기 시작한 이래 등대는 희망과 숙명 같은 존재였다.”면서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를 사례를 예로 들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사냥 장면과 약 22종에 이르는 육지와 동물 그림은 7000년 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먼 바다로 나가 고래사냥을 하는데 등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시대에는 현재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 망산도 섬에서 횃불을 밝혀 선박을 인도하며 등대의 역할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옛날에는 육지에서 봉화를 올려 적의 침을 알리는 방식으로 등대가 역할을 했고 먼 바다에 나갔다가 해안가로 돌아올 때에도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등대가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초의 등대는 기원전 279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만 입구의 파로스 섬에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서양식 등대는 일제 강점기에 설치됐다. 19세기말 일본과 서구 열강이 조선에 진출할 무렵 일본은 강화도 초지진을 포격하고 군사를 상륙시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고 미국 등 서구 열강은 해안에 상선과 군함이 늘면서 자국의 선박을 보호를 위해 등대를 설치했던 아픈 역사였다.
우리 정부는 일제의 강요로 1902년 3월 20일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인천항에 등대를 세운다는 계획을 미국 외 7개국에 외교문서로 고시했고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의 출발점이었다.
1902년 5월부터 인천 팔미도와 소월미도에서 등대 공사에 착수됐다. 1903년 6월 1일 팔미도등대의 첫 불빛이 켜졌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등대의 탄생이다. 이후 1904년 인천항 부도등대, 1906년 울산항 울기등대, 1906년 제주항 우도등대, 1905년 여수항 거문도등대, 1905년 목포항 칠발도등대 등 군사적 요충지에 등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나라 섬과 바다에는 5369기의 등대가 설치됐다. 등대는 유인등대와 무인등대로 나뉘고 무인등대는 전지를 사용해 작동하며, 간혹 방사성동위원소 열전기 발전기를 동력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등대가 항해자의 전용물에서 일반인들의 정서적 치유의 공간, 해양문화 공간으로 전환돼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해양문화공간으로 지정된 등대는 9개소이고 등대원이 근무하는 유인등대 34개소다.
해양수산부 인천해양수산청 이영태 항로표지과장은 “등대는 선박과 항로 발달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 하고 있다”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등대 건물로 보이지만 항해자에게 있어 등대는 매우 중요하며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빛이었기에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된 해양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강조했다. 종합토론에는 김주언 데일리스포츠한국 논설주간, 박종덕 서울신문 국장, 서명석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 이정아 삼성언론재단 부장 등이 참했다.
해언회 박상건 회장(섬문화연구소장)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해양무대를 터전으로 삶과 문화를 일구고 경제적으로 해운항만, 해양수산 경쟁력을 갖게 됐다”면서 “섬과 해양의 중요성, 그 가치를 연구하고 널리 알리는 일은 해양민족의 후예로서 언론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언회는 매월 해양학술세미나와 현장답사를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