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서정춘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하류」(도서출판 b, 39쪽)를 펴냈다. 31편의 알짜배기 시편들을 묶었는데 짧고 강한 울림의 서정시를 선보이는 시인답게 ‘시인의 말’도 두 줄에 불과하다. “하류가 좋다/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일반적으로 상류가 하류가 보다 맑고 풍경도 멋질 것 같은데 시인은 ‘하류’에 주목했다.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먼
여울 물소리
- ‘하류’ 전문
계절마다 새싹이 움트고 낙엽이 지고, 다시 윤회하는 그런 자연. 그 자연 속에서 다양한 야생화, 물고기, 새소리, 심지어 하늘과 바람까지 새로 옷을 입고 벗기를 반복한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그렇게 지상에 핀 것들은 다시 껍데기가 되고 밑거름이 되면서 자연은 공존한다.
상류에서 하류에 다다를수록 신비감은 사라기기 마련이다. 대신에 물줄기는 바위에 부딪치고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부딪치고 뒤틀리면서 돌멩이들을 더욱 빛나게 다듬는다. 하류로 가는 것들의 이런 몸부림과 아래로 낮게, 낮게 흘러가는 것들의 변화는 희망을 향한 몸짓이다. 저 산봉우리의 한 그루 이름 없는 나무에서 뚝, 맺힌 이슬 한 방울은 그렇게 계곡에 낙엽 지는 소리와 새소리들을 다 모아 계곡의 화음을 만들어 하류를 향한다.
물소리는 메마른 하류의 강변과 대지를 적셔 그렇게 하류의 새로운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 에너지가 강물이 되고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이를 노자는 도(道)라고 불렀다. 그렇게 하류의 강변 혹은 계곡으로 내려온 물줄기는 가을을 맞고 겨울을 보낸다. 새로운 잎과 낙엽으로 피고 지고 도로 벗기를 반복한다. 여기서 ‘도로’라는 단어가 자동차와 사람 다니는 도로까지 연상시켜 중의적 표현의 감칠맛까지 내준다.
‘그 자동차도로까지 다 벗고’라고 생각한다면 ‘하류’의 여백과 새로움도 배가돼 이 시의 상상력이 확장된다. 대부분 ‘스스르’라고 표현했을 법한데 이 표현 역시 시인은 ‘하르르’ 리드미컬한 단어로 감각적으로 처리했다. ‘하류’ 어감과 동질성을 회복하며 더 정겹고 따뜻해진다.
그렇게 먼 길을 걸어온 ‘여울 물소리’의 하류는 온갖 찌꺼기들이 합류한 물줄기로써가 아닌 희노애락 혹은 고진감래의 삶들이 하르르 녹아들면서 더불어 젖어들고 풀어지면서 마지막 여정의 카타르시스가 된다. 그래서 ‘여울 물소리’는 ‘여운이 긴 물소리’로 출렁여 온다.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주시니 방긋 웃으시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미소展’ 전문)
눈사람은 돌멩이나 막대기로 눈, 코, 입 모양을 만들면서 완성된다. 입은 화룡점정이다. 생명이 없는 막대기가 입이 되어 주면서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시인은 아이들의 동작을 높임말로 표현했다. ‘만드실 때’, ‘모셔와’, ‘붙여주시니’, ‘웃으시어’ 그리고 ‘입적하시느니’라는 마지막 문장을 경어 처리했다. 아이가 만든 눈사람은 마침내 햇볕을 만나 스스르 사라진다. 이 과정을 ‘입적’으로 표현했다. 찬란한 햇살에 생을 마감하는 액자그림 속에서 독자는 아이와 이를 바라보는 화자가 된 시인과 스님의 마지막 일생이 오버랩 됨을 느낀다.
부처(붓다)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을 성불이라 한다. 승려의 죽음을 입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입적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부처의 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적멸’은 열반을 뜻한다. 모든 번뇌를 태워 버리고, 기쁨도 슬픔도 없는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해탈의 순간이다. 눈사람은 우리에게 해탈의 순간을 떠올려준다. 자고로 아름다운 인생길은 그렇게 붓다의 깨달음처럼 나날이 깨닫고 버리고 비우면서 가는 길이다.
시 제목이 ‘눈사람’이 아니고 ‘미소展’으로 격상된 배경에서 보듯이 시인은 붓다의 삶처럼, 혹은 윌리엄 워즈워드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시처럼 그렇게 살고지고 싶었을 게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노니 내 남은 나나들이/그 자연의 신성함을 지킬 수 있기를”
‘쪽지’라는 시에서 시인의 이런 심성과 삶의 한 장면을 유추 할 수 있다. “나비시를 지었다/시가 안 돼 접었다/여러 번을 접었다/여러 번을 접었다/다 털고/나비는/날/았/다” 나비의 날개 짓은 털어내는 행위다. 털어내면 털어낼수록 날개 짓은 힘을 동반한다. 그 역동성이 높이 나는 심리적, 물리적인 기제가 된다. 평생 짧게 시 쓰는 일에 매진한 시인은 더 털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여러 번’, ‘여러 번’, 털어내기를 반복한. ‘접었다’는 ‘버렸다’ ‘비웠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리고, 비워서, 아름답게 나는 나비처럼 나비시(詩)를 썼던 것이다.
사랑 없이 관심 없이 시를 쓸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사랑과 관심은 속세의 너절한 욕망도, 언어유희 따위의 시작행태가 아니다. 가능한 다 버리고, 비우면서 발원하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예술에는 오류가 있을지라도 자연에는 오류가 없다. 영국의 시인 드라이든의 일갈이다. 괴테는 “자연의 극치는 사랑이며 사랑에 의해서만 자연에 접근할 수 있다”고 갈파했다.
서정춘 시인의 서정적 풍경화들이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것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깊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워서/많이 울었을 것이다//사랑해서/죽도록 울었을 것이다”(‘매미사랑’ 전문)
매미는 수컷만 운다. 암컷은 나무 구멍이나 잎사귀에 알을 낳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암컷매미의 아랫배는 발성기관 대신 산란기관으로 채워져 있다. 암컷은 기뻐도 슬퍼도 울지 못한다. 수컷은 매미 집이 침입하거나 열정에 가득 찰 때면 귀가 터질 정도로 울어댄다. 하지만 암컷은 온몸으로 몸부림칠 뿐이다.
매미의 삶은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 동안 땅 속에서 유충으로 살다가 지상에서 성충이 된 후 한 달의 삶을 산다. 이 한 달 동안 번식 활동과 지상의 모든 삶을 영위한다. 그러니 더 깊고 열정적인 사랑을 할 수 밖에.
‘그리워서 울고’, ‘사랑해서 죽도록’ 운다. 이런 매미일생을 통해 우리는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정, 자본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나마 자연에 눈길 주고 여유와 여백이 있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 시편은 그런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캘린더 호수’, ‘이슬에 사무치다’ 등이 있다. 지난 2018년 등단 50주년 기념집 ‘서정춘이라는 시인’을 펴냈다. 박용래문학상, 순천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백자예술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