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영 시인의 시선집 ‘시사백 사무사(詩四百 思無邪)’가 푸른사상사에서 출간됐다. 60년 문학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작품 중에서 시인이 직접 선별한 400여 편을 모았다. 이 책을 통해 한 시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꽃씨를 묻듯
그렇게 묻었다,
가슴에 눈동자 하나.
독경을 하고, 주문을 외고,
마른 장작개비에
불을 붙이고,
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꽃씨를 떨구듯
그렇게 떨궜다,
흙 위에 눈물 한 방울.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
목선 하나 삭고 있는데
꽃씨를 날리듯
그렇게 날렸다,
강변에 잿가루 한 줌.
- ‘꽃씨를 묻듯’ 전문
꽃씨를 묻듯, 그렇게 걸어온 시인의 길이었다. 꽃씨는 시인의 눈동자가 되고 눈물이 되었다. 때로 “마른 장작개비에/불을 붙이고,/언 땅에 불씨를 묻었다.” 사계절의 순환하는 동안 시인도 자연과 더불어 “꽃씨를 떨구듯/그렇게 떨궜다”. “돌아보면 이승은 메마른 갯벌”임을 알았다. 꽃씨는 척박한 땅을 견디고 헤치면서 나무를 키우고 숲을 이루고 하늘 아래 바다를 이뤘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그 뒤안길에 “목선 하나 삭고 있”었고 “강변에 잿가루 한 줌.”으로 남았다.

‘사무사(思無邪)’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음을 말한다. 공자가 시경에 305편을 뽑은 후 한 말이다. 오세영 시인은 “방자하게도 나 또한 공자의 흉내를 한번 내보고자 한다”면서 “나의 시도 과연 ‘사무사’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인가. 설령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 같은 마음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지금까지 노력해왔던 한 시인의 애잔한 시작(詩作) 생애에 차라리 연민의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시선집에 수록된 400여 편의 시들은 모두 오세영 시인 자신이 고른 것들이다. 한 가지 의식한 것이 있다면 연시(戀詩)들은 일절 배제했다는 점. 수년 전, 연시들만을 모아 ‘77편, 그 사랑의 시’(황금알, 2023)라는 제목의 시선집을 내놓은 바 있기 때문이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 ‘바닷가에서’ 전문

해마다 섬문화연구소는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연다. 그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낭송하는 대표 작품 중 하나가 이 작품이다. 그해 여름 덕적도 바닷가에서 오세영 시인은 촛불을 켜들고 이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노을 무렵, 창밖에 파도소리는 시적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바닷가/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이/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얻는 평안이/거기 있다.” 살며 답답하고 힘들 때, 이 시는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큰 용기와 슬기를 준다.

오세영 시인은 194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1968년 박목월에 의해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시집 ‘사랑의 저쪽’, ‘마른 하늘에서 치는 박수소리’ 등 29권, 학술서 및 산문집 ‘시론’ 등 24권이 있다. 만해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소월시문학상, 고산문학상을 수상했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이다.
박상건(시인. 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