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국은 고·양·부 삼을나가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하면서 탄생했다. 삼성신화 속 ‘벽랑국’의 궤적을 쫓아 그 명칭이 실재함을 밝혔던 채바다 고대항해탐험연구소장이 ‘벽랑국’의 실체를 찾는 기획물 ‘벽랑국, 그 뱃길을 찾아서’를 모두 6회 연재한다. 채소장은 고대 문화이동의 통로인 뱃길 탐사에 관심을 두고 1996년부터 한·일간 제주전통배인 ‘떼배’를 만들어 고대뱃길탐사에 나선 바 있다(편집자 주).
탐라는 고·양·부 삼을나가 벽랑국 세 공주와 혼인하면서 탐라국 시대를 열어갔다.
오늘까지 세공주가 왔다는 벽랑국은 과연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안개에 가려진 채 그 궁금증만 더해 갔던 것이 사실이지만 어느 한편으로 아예 바다 한 가운데 떠돌고 있는 섬이려니 하고 포기한 심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망국의 서러움으로 사랑하는 모국을 떠나 육지를 눈앞에 바라보고서도 상륙도 못하는 보트 피플 신세가 되고 말았을 운명에 처해 살아 온 것이 벽랑국 세 공주가 아닌가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 공주가 왔을 것으로 판단되는 벽랑국을 찾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이름조차 바뀌고 말았다. 한 때 망국의 설움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 했다. 벽랑국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제일 작은 왕국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그 문헌과 기록들을 찾게 돼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주지’와는 다르게 ‘고려사 지리지’에는 일본국으로 등장하고 있어서 필자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문은 하나씩 풀려 나갔다. 그것은 10여 년 넘는 한·일 고대 뱃길 탐험에서 얻은 결과물로 보인다. 우선 ‘고려사 지리지’에 나타난 일본국은 아니라는 까닭과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문제 접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필자가 그동안 조사 연구를 통해 얻은 내용들을 여기에 기술하고자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70년 문무(文武10년12월)에 보면 ‘倭國更號日本.自言近日所出以爲名’이란 기록이 있다. 이 말을 풀어 쓰면 왜나라가 국호를 바꿔 일본이라 하였다. 이는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이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다음에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동이전(東夷傳)’에서도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관련 기록은 “日本國者倭之別稱也 以其國在日處故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이라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일본국은 왜의 다른 명칭이다. 이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요.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라 함은 떳떳하지 못한 이름이어서 스스로 싫어하였으므로 그런 이유로 일본이란 이름을 고쳤던 것이다.”라는 뜻이다.
필자가 여기서 예문을 들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서기 670년에 등장한 사실이다. 이것은 탐라국 탄생 역사를 이 연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또 한 예를 들어 보자.
1907년에 출간된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 요시다 도고(吉田東伍·와세다대 교수)가 쓴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라는 책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1910년보다 3년 앞서 나온 일본에서는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책으로 알려진 권위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제 4부로 나눠져 있는데 제3부 ‘국호편’에 ‘일본’이란 국호의 뿌리를 논술한 대목이 있다. 이 책에는 “일본이란 국호는 한민족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으나 일본 사람들이 아름답고 우리나라 이름으로 쓰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만고불변의 국호로 삼았다”라고 쓰여 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그 동안 아무런 반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출판된 지 100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변함없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점이 많다.
그 후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요미우리신문>에도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일이 있다.
이 밖에도 반노부도모(伴 信友)·호시노히사시(星野恒)·기무라마사지(木村正辭) 등 여러 유명 고대 사학자들이 있다. 이밖에도 저명한 사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도 그의 저서 ‘일본상고사개요’에서 “일본의 국호는 한인들이 지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상 지적한 대로 고려사에 일본이라는 등장은 석연치 않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탐라국 탄생시조인 고량부의 가계보에서 밝히고 있듯이 최초로 이 섬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활을 쏘며 사냥한 동물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혈거생활을 하는 채집과 농경생활을 무대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고조선의 단군 탄생기원과 비슷한 연대로써 50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실들을 두고 ‘일본국’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주고씨연원’을 보면 BC. 53년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형제가 신라에 입조하여 성주(星主), 왕자(王子), 도내(徒內) 작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는 어떠한 국가 형태도 발달하고 있지도 않은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