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는 인천에서 202km 해상에 떨어져 있는 섬이다. 서해 북단에 위치한 섬으로 바로 건너편이 서해 최북단 백령도다. 인천항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 소요된다.
대청도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 소재지 섬이다. 풍부한 수자원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청정바다 섬이다. 섬 면적은 15.60㎢이고 가장 높은 곳은 343m 삼각산이다. 섬은 크게 5개 해안으로 이뤄졌고 동쪽에 지두리 해안과 농여해안, 서쪽에 답동해안, 남쪽에 모래울해안, 북쪽에 옥죽해안이 펼쳐진다. 서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해안선이 붙어 있다.
대청도는 수산업 전진기지로 다양한 어종의 수산물이 풍부해 주민 80%가 어업에 종사한다. 대청도 등 서해 5도는 꽃게 주산지다. 인천시는 내년 말까지 대청도에 ‘꽃게 등 수산종자생산시설·연구소’를 건립해 이들 해역의 꽃게 종자 공급체계를 구축하고 어민들의 소득 증대를 지원할 계획이다.
소청도는 대청면에 딸린 섬이다. 인천항에서 210km 해상에 떨어져 있다. 대청도 보다 백령도에더 가까운 섬이다. 섬 면적은 2.91㎢, 해안선길이는 13.1㎞다. 서해 최북단에 위치해 북한과 가까운 탓에 선박운항에 통제를 받고 그만큼 해상교통이 취약하다. 군사시설이 많아 주민들은 예동, 노화동 두 개 마을에 거주하는데 전형적인 어촌이다.
대청도와 소청도는 1793년에 주민이 입도했고 1894년에는 황해도 연주군에 속했다가 1928년 백령면, 1974년 대청면 승격 후 1995년에는 경기도에서 인천시로 편입됐다.
대청도와 소청도는 예부터 중국으로 들어가는 교통로였고 백령도와 함께 귀양지 섬이기도 했다. 중국이 침략할 때는 백령도, 연평도 군대와 함께 최전선에서 방어하는 요충지 섬이다.
섬 유래에 대해 옹진군 홈페이지에는 “돌만 있는 암도(岩島)가 아니고 수목이 무성한 큰 섬”이란 뜻에서 대청도라 부른다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푸른섬’이라는 뜻을 음을 따서 소리 나는 대로 한자 표기한 것이 ‘포을도’고 이 뜻에 따라 한자로 쓴 게 청도(靑島)다.
청도, 즉 대청도와 소청도 지명은 배를 타고 중국을 오가는 뱃사람들에 의하여 항해 중 표적인 푸른 섬으로 불리다가 청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칭다오 해양대학 관계자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 울창한 산림이 검푸르고 이 검푸른 색깔을 빗대어 검푸른 섬이라는 뜻의 청도(靑島)라고 불렀다는 것. 흑산도가 짓 푸른 섬이라는 뜻에서 유래하고 어청도가 깊고 맑다는데서 유래한 것을 보면 서해 깊은 섬들의 유래는 이러한 유래와 흡사하다.
소청도는 원래 황해도 옹진반도와 연결됐던 평원상의 지형이었으나 후빙기 해수면 상승으로 돌출된 지형의 상부가 남아 섬이 됐다. 섬 모양은 북동쪽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길쭉하게 생겼다. 북동쪽에 표고 174m 고지가 있고 대부분 낮은 구릉으로 이뤄져 경작지는 개간한 곳이다. 그 서남단에 소청도등대가 서있다.
남쪽해안은 해안절벽이고 해식애와 파식대가 형성됐다. 자갈과 모래사장이 만곡형의 해안을 이룬다. 소청도는 원생대 안석인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가 발견됐다. 이는 생물의 광합성을 발견할 수 있는 층 모양의 줄무늬 암석이다. 이러한 암석지대는 지구생명의 근원과 탄생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열쇠로 알려졌다.
오스트레일리아 샤크만에 있는 하메린풀에서 스트로마톨라이트가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대리석 기암총석(奇巖叢石)이 해안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암석으로 이뤄진 남동쪽의 분바위 해안은 천연기념물 제508호다. 흰 바위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자랑한다.
소청도에는 소청분교와 가장 높은 고지를 중심으로 곰솔이 자생한다. 동백나무, 팽나무, 사철나무, 밤나무 숲이 우거졌다. 졸참나무, 상수리, 고로쇠나무 등도 많다. 숲에 멧비둘기 재갈매기 등 해양성 야생동물이 서식한다. 원추리, 달래, 두릅, 머위, 더덕 등 산채식물과 삼, 칡, 하지초 등 약초도 서식한다.
소청도등대 아래 해안은 전복, 고동, 성게 등이 풍성하게 분포한다. 어종으로는 농어, 우럭, 놀래미, 홍어, 멸치가 많다. 질 좋은 미역과 톳 등이 풍부하다. 이러한 해양조건 때문에 사계절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정조실록’에는 섬의 서남쪽은 땅이 비옥하고 떡갈나무가 많고 동백과 춘백이 십중팔구라고 기록했다. 대청도는 먹거리가 풍부한 반면에 소청도는 거센 파도로 인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는데 주로 홍어 잡이를 했고 배를 타고 보름 걸려서 영산포까지 가서 식량으로 바꿔왔다고 기록했다.
또 두 섬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 배가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에 끼어서 걱정이 많다고 기록했다. 중국 배가 표류하거나 풍랑을 만나면 소청도로 오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과 경계지점 섬 주민들이 갖는 정서적 특징과 같다.
소청도등대는 소청리 산 37번지에 있다. 답동선착장에서 1시간 정도 거리다. 가파른 길과 작은 산등성이를 세 번 넘는다. 1908년에 설치한 소청도등대는 우리나라 최초 팔미도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역사적인 등대다.
등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역할과 수산업 전진기지를 밝히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등대는 섬 서쪽 83m 고지에 우뚝 서서 서해안 북단 해역과 산둥반도, 대연지방을 오가는 국내외 선박의 뱃길을 비추고 있다.
소청도등대는 일제를 거쳐 광복 후, 오늘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등대장을 지냈던 남만포 선생은 “6.25 때 등대 근무했던 적이 있는데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숱한 고초를 겼었다”고 토로했다. 등대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항해하는 선박을 돕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어느 쪽이든 등대를 먼저 점령했고 등대원들의 사상문제를 따졌다. 등대원들은 오로지 저 바다를 밝히고 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일에 복무할 뿐인데 말이다.
소청도등대는 1908년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유인등대로 설치됐다. 1954년 7월 석유등을 전기식으로 교체했다. 등대 불빛은 40초에 네 번씩 깜박인다. 안개가 끼면 무적신호로 45초마다 소리를 울리고 5초 동안 멈췄다가 다시 40초 째 길게 소리를 내어 등대의 위치를 알려준다.
1990년 12월에 등대를 수리하고 옛 모습은 복원해 여행자들이 주변 바다를 조망하고 그 날의 역사와 등대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등대 해양문화공간을 조성했다. 돌이켜보면 소청도에는 1972년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나 등대원 생활은 달라질 게 없었다. 석유등에 석유를 넣고 공기를 압축하면 석유가 분사되면서 렌즈로 반사돼 빛을 발하는 작동이 반복됐다.
기계실에서 레일을 깔고 기계를 움직이면서 에어폰을 작동하는 데 이런 과정들은 늘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밤바다를 비춰야 할 등대 불빛이 멈춰 설 수는 없는 일. 누군가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빛, 그 불빛을 밝히고자 평생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등대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