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풍경이 있는 삶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신경림, '갈대'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신경림,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전문 1956년 <문학예술>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이
박상건 기자 2022-05-13 09:16:13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눈’, 최승호 ‘대설주의보’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눈’, 최승호 ‘대설주의보’

살을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 오세영, ‘눈’ 중에서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hel
박상건 기자 2021-01-15 11:22:30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인생을 음미하는 서정춘 시인의 시집 '하류'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인생을 음미하는 서정춘 시인의 시집 '하류'

팔순의 서정춘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하류」(도서출판 b, 39쪽)를 펴냈다. 31편의 알짜배기 시편들을 묶었는데 짧고 강한 울림의 서정시를 선보이는 시인답게 ‘시인의 말’도 두 줄에 불과하다. “하류가 좋다/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일반적으로 상류가 하류가 보다 맑고 풍경도 멋질 것 같은데 시인은 ‘하류’에 주목했다. 옷 벗고 갈
박상건 기자 2020-11-11 11:05:10
[시와 풍경이 있는 삶] 박노해, ‘밤나무 아래서’

[시와 풍경이 있는 삶] 박노해, ‘밤나무 아래서’

이럴 때가 있다 일도 안 풀리고 작품도 안 되고 울적한 마음으로 산길을 걸을 때 툭, 머리통에 꿀밤 한 대 아프다 나도 한 성질 있다 언제까지 내가 동네북이냐 밤나무를 발로 퍽 찼더니 후두두둑 수백 개의 밤톨에 몰매를 맞았다 울상으로 밤나무를 올려봤더니 쩍 벌어진 털복숭이들이 하하하 웃고 있다 나도 피식 하하하 따라 웃어 버렸다 매 값으로 토실한 알밤을 주머니 가득
박상건 기자 2020-10-16 07:10:21
[시와 풍경이 있는 삶] 김현승, '플라타너스'

[시와 풍경이 있는 삶] 김현승, '플라타너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중략)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중략) ​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
박상건 기자 2020-09-25 08:48:59
[시와 풍경이 있는 삶] 김현승, ‘가을의 기도’

[시와 풍경이 있는 삶] 김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김현승, ‘가을의 기도’ 중에서 이 시는 김현승 시인의 1957년 첫 시집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다.
박상건 기자 2020-08-21 08:57:53
[시와 풍경이 있는 삶] 박상건, ‘큰가시고기’

[시와 풍경이 있는 삶] 박상건, ‘큰가시고기’

암컷이 유속에 흔들리며 수초 물어 나르기에 분주하다 그렇게 수초 둥지에 알을 낳고 죽어간 빈자리에 수컷이 밤낮없이 흰 지느러미를 흔들어 쌓는다 물살에 뒤틀리면 돌멩이에 몸을 걸치고 다시금 부화를 위해 줄창진 저 지느러미의 부채질 20여 일을 꼬박 밤새워 흔들어 쌓던 지느러미가 파랗게 멍들어 숨을 멈추던 날 수초더미에서는 가시고기 새끼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치
박상건 기자 2020-08-14 09:15:42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 서정춘,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전문 한국적 토착정신이 시에서조차 사
박상건 기자 2020-07-26 09:21:30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7월’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오세영, 7월’

바다는 무녀 휘말리는 치마폭 바다는 광녀 산발한 머리칼 바다는 처녀 푸르른 이마 바다는 희녀 꿈꾸는 눈 7월이 오면 바다로 가고 싶어라 바다에 가서 미친 여인의 설레는 가슴에 안기고 싶어라 바다는 짐승 눈에 비친 푸른 그림자 - 오세영, ‘7월’ 전문 바다는 한 번은 비워내고 비운 만큼 채운다. 그렇게 썰물과 밀물이 공전하며 수평을 이룬다. 때로 해풍에
박상건 기자 2020-07-19 16:20:05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서정춘, ‘죽편・1’

[시와 풍경이 있는 삶] 서정춘, ‘죽편・1’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 서정춘, ‘죽편(竹篇) 1-여행’ 전문 시란 본디 짧은 형식이지만 서정춘 시인의 시는 짧으면서 강한 울림이 있다. 메시지는 서정적 가락을 타고 풍경화로 연출된다. 숱한 사연들이 한 매듭 한 매듭 맺고 비워지면서 성장하는 대나무는 비운만큼 더 높은 하늘로 푸른 꿈을 키
박상건 기자 2020-07-03 09: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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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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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섬으로 여행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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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디브, 보라보라, 발리......’ 신문에서 자주 접하는 섬들이다. 이곳에는 무성한 야자수와 금가루 같은 백사장, 그리고 돈 많은 관광객이 있다. 여행사마다 다양하게 내어놓은 여행 일정들-‘환상의 섬 몰디브, 4박 5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그 섬에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의 총무, K의 전화를 받은 건 며칠 전이었다. 모처럼의 통화였지만 K의 목소리는 어제 만나 소주라도 나눈 사이처럼 정겨웠다. “형님, 날도 슬슬 풀리는데 주말에 섬 출사 한번 갑시다.” “섬 출사
(7) 떠나가고 싶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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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모두가 묶여 있은 세상. 떠나고 싶다. 묶인 일상을 풀고 더 넓은 바다로 떠나고 싶다. 저 저 배를 바라보면서 문득, 1930년 내 고향 강진의 시인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파로 활동한 박용철 시인의 ‘떠나가는 배’
(6) 호미와 삽

(6) 호미와 삽

소만은 24절기 가운데 여덟 번째 절기다. 들녘은 식물이 성장하기 시작해 녹음으로 짙어진다. 소만 무렵, 여기저기 모내기 준비로 분주하다. 이른 모내기, 가을보리 먼저 베기, 밭농사 김매기 손길이 이으면서 겨우내 창고에 있